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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정리/소설

친애하는 10년 후의 너에게. - 아마사와 나츠키

by kkulding 2023. 4.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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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아마사와 나츠키, loundraw


1999년 전후로 타임캡슐이 유행했었던 시절이 있습니다. 작가는 빠른 세월 속, 뇌리에서 금방 잊히는 '타임캡슐'이라는 소재 잘 활용하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 6명의 소년, 소녀가 '10년 후의 나에게' 쓴 편지들을 담은 타임캡슐이 우편으로 오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타임캡슐은 아사이 치히로, 키리하라 토야, 소메야 유우, 니노세 미나츠, 모리야 토키코, 아가미 아키라 순으로 전달되며 이 여섯 명의 시점 순서대로 6개의 에피소드(챕터)가 진행되지요.

대부분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처한 현실에 순응하고 나날을 보내던 고등학생들이지만 이 주연들은 각자 자신의 진로와 현재 환경, 인간관계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임캡슐에 있는 10년 전의 내가 쓴 편지 내용을 보고선 과거를 회상하며 현실의 자신에게 괴리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10년 전의 자신에게 용기를 얻거나 경각하여 마음이나 생활 태도를 바로잡아 옳은 생활로 되돌아가거나 발전된 생활로 나아가게 되는, 희망차고 따뜻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작가는 소설 전반에 걸쳐 고등학생 6명이 각자 느끼는 고민과 학교 생활에 대하여 사람들이 매우 공감되도록 진지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게 묘사하였습니다. 화자(서술자)가 고등학생이기 때문에 고등학생이라는 풋풋한 나이에 걸맞은 심리와 정서를 표현했지요.

특히, 여섯 주연 중 시작과 끝을 매듭짓는 1장의 아사이 치히로와 6장의 아가미 아키라가 서로를 계속 생각해왔던 마음과 5장에 걸쳐 해결되는 두 사람의 인연이 소설의 몰입도를 높이고 여운을 강하게 주었습니다.

그리고 1장, 6장과는 다르게, 2장에서 5장까지의 주연들(키리하라 토야, 소메야 유우, 니노세 미나츠, 모리야 토키코)의 갈등 해결은 자신이 쓴 10년 전의 편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솔직한 시선과 대화를 통해 해결되는 면이 두드러집니다. 이때, 그 다른 사람은 다른 에피소드에 나오는 주연입니다.

이처럼 전체의 줄거리를 각각의 에피소드가 아닌, 색연필과 크레용, 10년 전 자신이 쓴 편지와 공교로운 인연, 소설 중간중간 등장하는 벚꽃이라는 표현과 소설 속 벚나무 등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여 줄거리를 개연성 있게 짜맞추는 다양한 장치들이 소설의 흥미도를 높였습니다.

밝고 풋풋한 청춘물을 읽고 싶거나, 현재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시는 분들에게 추천드리는 책입니다. 정말 재밌습니다. 구매를 고민하신다면 구매하시길 바랍니다.

아래는 챕터별로 공감이 많이 가면서 마음에 드는 수사법이나 심각한 분위기에 몰입되던 부분들을 모아뒀습니다.

1장. 싫은 건 아니지만 두근거리지 않는, 모호한 선배와의 연애 관계와 과거 아키라와의 일 때문에 재능과 진로를 결정 못 하고 있는 치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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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코야 미대요? 무리예요, 무리. 그 뭐랄까, 거기는 굉장히 멋져 보이는 사람뿐이고 다들 진지하게 하잖아요. 저, 그림으로 먹고살 생각은 없는걸요. 어중간한 각오로는 들어갈 수 없어요."

  •  반은 진짜고 반은 거짓말.

  •  특별히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고 선배가 싫은 것도 아니다. 성격은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대화는 즐겁고. 하지만 뭐랄까… 쉽게 말하자면 달달해지지 않는다.
     집 근처 청과상 앞을 지나는데 오렌지를 개당 88엔에 팔고 있었다.
     ─사랑은 오렌지 같은거야.
     반 친구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둘이 있으면 있을수록 달달하고 선명하게 익어 가는 오렌지. 조금 쓴맛이 나거나 썩어서 떨어지는 열매도 있지만 그것을 포함하여 오렌지. 그녀의 말에 따르면 행복한 커플은 오렌지색을 띤다고 한다.
     시인 납셨다고 놀렸지만 지금은 어쩐지 알 것도 같은 이유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리라.
     88엔짜리 오렌지는 뚜렷한 주황색을 띠고 있었다. 나와 마츠시마 선배는 언제까지고 익지 않는 파란 오렌지다. 나는 물론이거니와 아마 선배도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으리라. 하지만 모르는 척, 달달한 척 우리끼리 파란 껍질 위에 오렌지색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  왠지 요즘 나, 정말 최악이네. 연인에게 소홀히 하고 남의 프라이버시를 소홀히 하고. 그러면서 자신은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아우성을치다니 바보 같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이제 됐다. 이왕이면 철저히 규탄받고 싶다. 야가미가 나를 손톱에 낀 때로도 여기지 않았다면 그건 분명 벌이다. 미래의 내가 이 모양이 되어 버린 데 대한, 10년을 끌어온 벌. 나는 자포자기하듯 곱게 접힌 편지지를 펼쳤다.

  •  "오늘은 앙뉘?"
     선배가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앙뉘네요."
     나는 대답했다. 오늘은 권태롭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시간은 평온하게 흘렀다. 그때까지와 마찬가지로. 차올랐다가 빠지는 바닷물처럼. 마음은 잔잔해져 있었다.

  •  2학기가 되어 공석이 된 야가미의 자리를 본 순간, 나는 비로소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깨달았다. 물빛 지문이 묻은 벚꽃색 색연필은 결국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했고, 나는 엉엉 때늦은 눈물을 흘렸다.

  •  "저, 코야 미대를 목표할 거예요."
     미래 같은 건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애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면 역시나 옆에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지리멸렬했다. 절반도 전달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선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래."
     겨우 입을 열었다.
     "그래."
     다시 한번 짧게 되풀이하고 불현듯 손을 뻗어 내머리 위에 얹었다.
     "열심히 해."
     그렇게 말하고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2장. 축구 강호인 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우수한 줄 알았던 자신의 변변찮은 능력과 동기와의 격차로 인해 열등감과 무기력함 때문에 축구 동아리 활동에서 도망쳐 유령 부원이 된 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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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녀오겠습니다."
     적당히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선다. 아침 6시 반. 축구부 아침연습은 7시 반부터다. 그러나 딱히 아침 연습에 나가는 것은 아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지금 유령 부원이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유령 부원이 되었다.
     축구부에 적은 두고 있다. 하지만 연습에는 나가지 않는다. 이른바 땡땡이. 아니, 퇴부 신청서만 내지 않았을 뿐 축구부에서는 실질적으로 퇴부 처리되었는지도 모른다. 1군이면 용납되지 않겠지만 3군의, 감독이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잔챙이이므로 용납이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아예 인식 범위 안에 없으리라. 그 상황에 안주하듯, 무언가에 매달리듯 유령 부원의 자리를 유지하는 자신의 갸륵함은 한심함을 뛰어넘어 도리어 눈물겨웠다.
     부모님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아리 활동에 나가는 척하느라 늘 일찍 집을 나서고 늘 늦게 귀가한다. 나는 졸업할 때까지 계속 이렇게 거짓을 연기할 셈일까. 그렇지만 축구만을 위해 지원한 사립고다, 비싼 학비를 대는 부모님에게 어떤 얼굴로 축구를 관둔다고 말하면 좋을지 나는 모르겠다. 아니... 사실 옷이고 가방이고 전혀 때가 타지 않았으므로 실은 눈치채셨는지도 모른다. 아무 소리도 없어서 고마운 듯하면서도 조금 쓸쓸했다.

  •  "재능이 전혀 달라. 아니, 재능이라기보다 연습량도 그렇지만. 전부, 무엇하나 상대가 안 되는 녀석이 있어. 알 수 있어. 보고 있으면. 절대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어. 누군가가 너는 특별하지 않다고 충고해 준 것보다 훨씬 충격적이더라고. 그래서, 왠지, 마음이 꺾였는데... 하지만 곧장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잖아? 축구를 하고 싶어서 무리하게 시험까지 쳐서 들어간 사립인데 벌써 1년 가까이 유령 부원 노릇 중이라고 부모님에게 말할 수는 없는걸."

  •  퇴부 신청서를 낼 요기도, 부모님에게 사실을 말할 용기도 없다. 그래서 보류해 왔다. 이도 저도 아니고 애매하게. 그상태에 안주하며 하천 부지에서 시간을 낭비해 왔다...
     "그럼 공을 버리는 이유는... 그것 때문인가요?"
     그것 때문.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응, 뭐, 그렇게 되려나. 공이라기보다 축구를 버리러 왔지만."
     그렇다. 나는 오늘 이곳에 축구를 버리러 왔다. 축구를 버리면 그길로 퇴부 신청서를 내러 갈 생각이고, 그것은 이미 남몰래 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그렇구나, 하고 그녀는 쓸쓸히 중얼거렸다.
     "축구가 싫어지고 만 거네요. 그럼 어쩔 수 없나..."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뭔가 오해가 있다.
     "어? 아니, 축구는 별로 싫지 않아."
     "네? 아닌가요?"
     눈을 동그랗게 뜨니 이쪽이 당활스러웠다.
     "응. 축구는 싫지 않은데..."
     싫었다면 공을 버리는 데 아쉬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네?"
     그녀는 이해가 안 가는 듯했다.
     "어? 뭔가 이상해...?"
     "아니, 그야 싫지 않다면 버릴 필요는 없잖아요. 다른 형태로 계속하거나 하면 되잖아요?"

  •  "축구는 좋아해요?"
     "...응."
     얘기를 마무리 짓고 싶었던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떨떠름하게 대답하면 분위기를 파악해 줄까 생각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축구부에 굉장한 사람이 있고 그것이 싫어져서 동아리 활동에 나가지 않는 건 이해했는데, 그게 왜 축구를 버리는 걸로 이어지죠?"

  •  고등학생이 되고도 축구 솜씨는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이제 리프팅 백 번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우리 축구부에서라면 누구든 할 수 있다. 축구에 대한 열정도... 분명 그 시절이 훨씬 뜨겁고, 훨씬 순수했다.

  •  "현실을 깨닫고 분수에 맞는 삶을 바라면 안 되나?"
     나는 괴로운 나머지 무언가 변명하듯 억지소리를 했다.
     "내게는 재능이 없으니 이제 관두자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뭐 잘못됐어?"
     대답은 빨랐다.
     "재능이 없으면 좋아하는 것도 하면 안 되나요?"

  •  "그 이론대로라면 잘하는 사람 외에는 축구를 하면 안 돼요. 늘 저쪽 코트에서 축구를 하는 어린아이들도 당신이 보기에는 축구를 할 자격이 없나요?"

  •  "하지만 나는... 이상에서 동떨어진 자신이 꼴사나워서...."
     "원래 그런 거 아닌가요?"
     "저도... 어릴 적 이상과는 거리가 먼걸요. (이하 생략)"

  •  "주변에 화려하고 예쁜 애투성이라 어쩐지 요새 갑갑해서. 그래서 가끔씩 여기에 기분 전환하러 와요. 저도 이상 따위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아요. 하지만 역시 지금도 멋진 여고생이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3장. 만화를 좋아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자신이 몰래 그리던 만화를 보고 놀리던 학우들 때문에 만화 그리기를 그만두고, 중등 학창 시절을 빈둥빈둥 변변찮게 보내면서 정시제 고등학교로 진학하여 품행이 불량한 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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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로를 물으면 대학으로 답하는 놈이 많은데 그 이휴를 말하는 놈도 드물게 있다. 이른바 꿈이라는 것. 의사가 되고 싶다. 파일럿이 되고 싶다.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 그것뿐이라면 꼬맹이의 헛소리와 다를 바 없지만, 고등학생쯤 되면 그를 위해 어떻게 하면 될지 생각해야 할 나이다. 구체적으로는 의과대학이라든지 항공대학교라든지 스포츠 유학이라든지, 그런 식으로 선택지가 좁혀진다. 그렇지 않더라도 이 대학에 가고 싶다는 둥, 이 전문 학교에 가고 싶다는 둥 저마다 나름대로의 목표를 발견하여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게 진로 선택이라는 것이리라.
     그렇지만 내게는 그런 게 일절 없었다. 고로 오늘도 조사표는 하얗고 앞날은 새까맣다.

  •  중학교 시절부터 품행이 불량하기로 유명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을 텐데 중학생이 된 나는 담배니 술이니, 뭐 그런 유의 못된 짓거리에 순식간에 물들어 갔다. 사귈 친구와 선배를 잘못 택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결국 그것을 선택한 사람도 자기 자신이다.
     동아리 같은 데는 들지 않고 빈둔빈둥 보낸 중학교 3년간은 그럼에도 비교적 순식간에 지나갔고, 고입 수험 철이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주위와 자신의 학력 차를 절실히 깨달았다.

  •  그렇더라도 선택지가 적은 내게 분에 넘치는 소리를 할 여유는 없었다. 전일제라도 노릴 만한 데는 있었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싶었으므로, 그렇다면 시간을 활용하기 좋은 정시제가 낫겠다는 생각에 나는 결국 그 정시제를 지원했다.
  •  내용 수준은 평등하지 않으면서 지루함 수준은 평등하다. 고로 듣지 않는 놈, 조는 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놈이득실득실하다. 나는 주로 자거나 낙서를 하는 쪽이다. 그래도 시험을 보면 그런대로 점수는 나온다. 요컨대 그런 수준인 것이다.
     진로 따위를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 주제를 벗어나는 일 같았다.
     동아리 같은 데는 들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지루한 수업을 어떻게 넘길까에 심혈을 기울이고 집에서는 기본적으로 빈둥거린다. 솔직히 침대 위에서 좋아하는 만화책의 최신간을 읽을 때가 제일 알차다. 그 만화의 결말을 알기 위해 살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잇따라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는 이 세상, 결말이 궁금한 만화는 넘치니 그때마다 내 수명도 연장된다. 딱히 자살 욕구가 있는 건 아니지만.
     오전 중에는 다시 취침. 때때로 아르바이트. 저녁때부터 학교. 그 밖의 시간을 나는 거의 내방에서 보낸다. 중학교 때 어울리던 놈들과도 가끔 만나지만(고등학교가 같은 놈들도 있으니까), 최근에는 무의미하게 허세를 부리기도 귀찮다 보니 그런 관계도 줄었다. 은둔형 외톨이라는 말을 들어도 부정할 수 없다. 커튼조차 꽁꽁 닫은 방 안에는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사방으로 뿌리를 뻗고 있어, 그 장소를 떠날 때마다 나는 마치 화분에서 뽑힌 식물이 된 기분이다. 당연히 변화는 달갑지 않았다. 나는 변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고양이보다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
     충동적으로 그렇게 쓰고서 조금 망설이다가 왠지 모르게 지웠다.

  •  '알아요.... 어릴 적 상상했던 미래의 나와 지금의 나란 전혀 다르죠. 생각한 것만큼 어른이 되지 못했달까.'
     '고등학생이란 꼬마일 적에는 엄청 어른으로 보였는데 실제로 되고 보니 별로 어른이 아니네. 좀더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진짜로.
     그러나 실제로는 고등학생이 되어 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세상에서 어린애 취급을 받으며 저희끼리는 발돋움하여 어른처럼 굴지만, 그러는 순간에도 역시 우리는 꼬맹이고 어린애고 어른 미만이다. 우리는 아직 '어린애'라는 쇠사슬에 묶인 채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있기에 무언가를 할 때마다 부모며 교사며 어른들로부터 그건 틀려, 이건 틀려 하는 고압적인 설교를 들어야 한다.
  •  'T 씨는 꿈 같은 거 없나요?'
     꿈.
     그날은 희한하게 답장을 쓰는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거, 없다... 아니, 그렇지만.
     8년 전 한때 마음에 품었던 그 감정이 불현듯 가슴속에 플래시백되어 나는 몹시 동요했다.

  •  그 후로 우리는 조금씩 말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란 무엇을 계기로 친해질지 모르는 법이다.
     좋아하는 만화는 뭐야?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은 뭐야? 어떤 얘기를 좋아해? 어떤 그림을 좋아해? 어떤 등장인물을 동경해?
     처음에는 어색하게 얘기를 나눌 뿐이었다. 하지만 A도 상당히 만화를 좋아했고, 더불어 그림 실력이 좋은 건 앞서 말한대로였기에 ㅇㅇ 그려 줘, 라고 요청하면 그야말로 훌륭하게 재현해 주었다. 크루아 남작을 그려 준 적도 있었다. 수염 개수를 틀린 것 말고는 매우 훌륭했으므로 어린 마음에도 작가 본인이 그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즐거움이나 감탄과 동시에, 나는 선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의 손에 동경심을 느꼈다. 하얗고 섬세한 손끝이 동경하는 만화 세계 캐릭터를 연필 하나로 그려 내는 모습은 살갗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을 듯한 고양감을 주었다. 그 무렵부터 내 만화 사랑은 굉장했지만 만화책 페이지 너머로 창작자를 상상할 만큼 달관하지는 않았었는데, 만화 캐릭터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첨으으로 의식하게 됐다. 나도 그려 보고 싶다는 마음은 조금씩 거세졌고, 이윽고 나는 스스로도 펜을 잡았다.
     8년 전, 그 한 때 나는 확실히 꿈을 발견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결국 지속되지 않았다. 그건 분명 정답이 아니었던 것이다. 얼렁뚱땅 웃어넘기는 사이 어떤 만화를 그렸었는지도 잊어버렸다.
     '없어. 꿈은 없어.'
     책상 위에 그렇게 답장을 쓰고 그날은 귀갓길에 올랐으나 아무래도 마음은 찜찜했다.

  •  '네가 하려던 일을 너 자신이 비웃지마.'
     써넣은 순간,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위화감을 가슴속에 느끼고 나는 얼른 그 페이지를 찢어 버렸다.

  •  지독히 서툰 그림인 데다 몇 번째 우려먹는지도 알 수 없는 스토리였지만 그녀는 늘 재미있다며 웃어 주었다. 무언가를 만드는 기쁨에 더해 그걸 칭찬받는 기쁨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있어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창작자의 숙명으로서 찬사와 비난은 항상 세트로 온다는 사실 또한 혹독한 현실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내 마음을 사정없이 꺾었다.

  •  아이들의, 꿈을 향한 동경이 들어찬 보물 상자.
     그건 지금의 내게 너무나도 눈부신 물건이었다.

  •  ─뭔가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위해 열심히 노력해 주세요.
     그렇지만 옛날의 나만큼은... 그 초등학교 4학년의, 만화를 정신없이 그리던 시절의 나만큼은 어물쩍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 아마 난 그 옛날 자신의 '이목'을 겁내는 것이리라. 결코 이쪽을 향할 리 없는 과거 자신의 시선에 겁을 먹었다. 아마 종합장을 밟았을 때부터 계속, 겁이 났으리라.

  •  기적이라는 놈은 대체로 무엇인가를 포기했을 무렵 예고 없이 찾아오기에 기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책상 너머로 주고 받는 대화는 즐거웠어요. 그림, 여전히 잘 그리네요. 꿈은 없다고 했지만 난 그렇게는 생각하지 않아요. 당신에게는 초등학교 4학년 여름에 분명 꿈이 있었을 거예요. 그것을, 그 시절과 다름없이 꿈이 아니라고 자신을 다그치고 있다면 나는 매우 섭섭할 거예요.
     그러니 그 시절과 같은 말을 건넬게요.
     네가 하려던 일을 너 자신이 비웃지마.
     나는 비웃지 않아요. 지금도 비웃지 않아요. 언젠가 당신의 만화를 읽을 수 있는 그날을 그 시절과 다름없이 기대할게요.

4장. 과거의 외향적인 남자 이미지와는 반대로 청춘 때는 여성미를 개발하고 즐기고 싶어 염색이나, 화장법을 배웠으나 익숙지 않은 날라리(학업에 열정이 없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학생) 무리 들어가 갑갑함을 느끼며 그 무리에서 중학교 시절 인연 깊은 절친을 따돌리게 된 내성적이고 소심한 미나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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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라오카 모모코. 중학교 때 선머슴 이미지를 떨치지 못하던 내게 바탕은 괜찮으니 다듬으면 빛날 거라고 말해 준 이가 그녀다. 머리가 좋고, 예쁘고, 키도 크고, 언제든 확실히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모모코는 내 동경의 대상.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건 절반은 교복이 이유지만 또 다른 절반은 모모코가 그곳에 가기 때문이다. 중학교 시절, 내가 얻은 유일하다고 해도 좋은 친구.
     그런데 지금, 나는 모모코를 따돌리는 쪽에 서 있다.

  •  모모코는 비교적 어떤 상대에게든 맞출 수 있는 타입이기에 처음에는 유코와도 친하게 지냈다. 다만 매사에 확실하게 말하는 타입이라 입이 험한 리사와는 곧잘 말다툼을 벌였다. 왠지 모르게 그룹의 넘버원은 유코였지만, 모모코는 그녀의 제안에 따르지 않는 넘버 투였으니 실질적으로 누가 넘버원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유코, 모모코, 리사가 3대 강자고 와카와 마리와 나는 금붕어 똥처럼 셋에게 착 붙어 다닐 뿐이었는데, 그래도 3대 약자 안에서 내가 최대 약자임에는 틀림없고, 그럼에도 모모코가 이래저래 나를 감쌌으니 와카와 마리는 그것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나를 보는 두 사람의 시선은 점점 차가워졌다.
     여름 즈음부터 모모코는 유코 일행과 그다지 놀지 않게 되었다. 여섯 명 다 어떤 동아리에도 들지 않아서 기본저그로 방과 후에는 다들 한가했는데 모모코는 나에게만 말을 걸어 놀자고 했다. 유코에 대한 심술이라기보다는 아마 단순히 그렇게 하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모모코의 성격은 그룹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혹은 내가 맞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서 끌어내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유코를 배신할 수 없었다. 무서웠다. 모모코만큼 강하면 유코에게 거역하고도 태연하게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무리였다. 유코에게 거역하면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나는 새삼스레 남자보다도 여자가 훨씬 무섭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중학교에서 나를 우습게 보던 남자들이란 얼마나 귀염성이 있었던가! 그에 비하면 유코는 북극의 얼음보다 더 차가운 눈으로 사람을 노려보았다.
     모모코는 내가 자기보다 유코를 택했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아니, 나도 그럴 의도는 없었고 모모코도 그렇게 도량이 좁은 여자애가 아니었다.
     그래도 모모코와 유코의 거리가 벌어지는 것에 비례하여 나와 모모코의 거리도 조금씩 벌어져... 이윽고 그 '사건'이 일어났다.

  •  나,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네.
     모모코가 조금씩 그룹에서 이탈하여 유코 일행과 별로 어울리지 않게 되었을 무렵. 그룹 안에 있기가 불편해 여기로 곧잘 도망 왔었다. 이따금 하천 부지에서 벌어지는 어린아이들의 축구 시합을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해진다. 옛날의 자신은 저런 모습이었다는 게 떠오르고 가슴도 아파 오지만 아마 나는 그 아픔을 확인하러 이곳에 왔으리라.
     그런데 같은 시기에 시도 때도 없이 하천 부지를 찾던 히메사카의 남학생이 있었다.
     조금 자란 머리카락과, 하얗지만 실내에만 있어서 하얀 게 아닌 미묘한 피부색. 울적한 표정이 신경 쓰여서 가끔 훔쳐봤었다. 늘 어린아이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다. 동경과 고뇌가 뒤섞인 듯한, 그것은 내 기분과 아주 닮은 것 같아서, 그래서 조금 신경이 쓰였다.

  •  어쨌거나 그 말로 그가 바뀌었는데 내가 바뀌지 않는다면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분명 축구를 계속할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채 지금도 매달리듯 하천 부지에 찾아와서 누가 구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무릎을 끌어안는다.

  •  "내가 아는 미나츠는 여러모로 좀 더 확실히 말하는 애였는데. 유코 일행과 어울리게 된 후로 너, 어쩐지 주위의 시선을 꽤나 의식하게 되었구나."
     나는 뜨끔했다. 아마도 정곡이었기 때문이리라. 유코한테 미움 받을까 봐, 화낼까 봐, 그보다 화나게 할까 봐 필요 이상으로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겉모습은 화려한 채고 반 아이들에게는 무서운 여자 그룹의 일원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어쩐지 모순된 나는 조금도 나답지 않았다.

  •  그때의 나는 어쨌거나 사와노 선배며 유코 일행의 추궁에서 도망치고 싶은 일념으로 모모코의 기분도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말해 버렸다.
     "모모코는 유코가 화내는 거 익숙하잖아. 도와줘."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심한 말을 했었다. 아마도 그것이 내 배신이고, 그것이야말로 사건이며, 그 후에 일어난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 아니, 그건 역시 지나친 소리겠지만, 여하튼 나와 모모코가 결별한 시점은 틀림없이 그 순간이었으리라 생각한다.

  •  3학년 진급 시에는 반이 바뀌지 않으므로 모모코에 대한 대우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해야 할 말을 모모코에게 시킨 데 혐오를 느꼈고, 유코의 보복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려 들지 않는 자신을 그보다 더 혐오했다.

  •  "내가 화난 게 있다면 네 그런 면이야. 자신의 감정에 언제까지 계속 솔직하지 않을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런 건 버릇이 돼. 대학에 가서 도망치면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지금 도망칠 수 없다면 분명 앞으로도 도망칠 수 없을 거야."

  •  정말이지 그저 약간의 용기였다. 필요한 것이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내가 하기 위한. 그것을 깨닫기까지 이토록 멀리 돌아온 나는 정말이지 바보고 구제 불능이고, 그럼에도 그런 구제 불능인 나와 다시 놀아 주는 모모코는 아마 내 평생 친구. 아니, 절대로!

 

5장. 집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은둔형 외톨이 토키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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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컴퓨터가 내는 소리는 감미롭다. 아니, 스피커에서 나오는 효과음, 경고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컴퓨터 펜이 돌아가는 소리나, 키보드를 치는 소리나, 마우스를 클릭하는 소리... 그런 컴퓨터 본체며 주변 기기가 연주하는 환경음.
     그것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방 안에 그 소리만 나는 게 좋다. 에어컨 소리도 좋다. 그게 없으면 여름철 컴퓨터는 맛이 가고 마니까. 그 밖에는 전부 잡음. 마침 창밖을 지나던 자동차 소리도, 아래층의 생활 소음도, 내 호흡 소리조차도. 그러므로 나는 컴퓨터를 만질 때 항상 숨을 죽인다. 마치 내 존재를 데스크톱 너머의 성역에 들키지 않으려는 것처럼.
     딱히 이차원에서 사는 건 아니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싫어하지도 않지만. 동영상 사이트에는 실사 드라마보다 애니메이션이 더 많이 돌아다니는 상황이라 시간을 때우려다 보면 자연스레 그쪽으로 기울 뿐이다. 비율의 문제. 일본인의 혈액형은 A형이 많으니 자연스럽게 A형인 지인이 많아지는 것과 마찬가지. 아마도.

  •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딱히 따돌림을 당했던 건 아니다. 계기라고 할 만큼 거창한 건 없다. 작은 일의 축적. 흔히 있는 스탬프 카드와 마찬가지. 하나씩 모으던 스탬프가 이윽고 가득 채워지면 무언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내 경우에는 그게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 였을 뿐이었다. 따돌림에 가까운 일을 당한 적도 있지만 그 또한 스탬프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사람을 사귀는 데 절망적으로 서툴렀다. 커뮤니케이션 장애라나, 이것도 인터넷에서 알게 된 단어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친구라 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도 없었다. 지인이라면 있었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친밀도의 등급은 타인→지인→친구→절친→연인으로 나뉘는 느낌이므로 만약 좀 더 분발했다면 친구 정도는 만들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절친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스탬프 카드가 가득 찼다. 내 경우 스탬프가 모이는 방식은 제각각인데, 예를 들어 누가 실내화를 감추면 스탬프 3개, 국어 시간에 낭독을 하다 발음이 꼬이면 스탬프 1개, 소풍 조 편성에서 마지막으로 남으면 스탬프 2개라든지, 뭐 그런 식이다. 스탬프 카드를 만든 때는 아마 중학교에 들어가면서였을 텐데 그로부터 조금씩 모인 스탬프가 고등학교 1학년 여름에 꽉 찼다. 평균 1일 1개로 치면 3년 남짓이니 천 개쯤. 거참 용케도 모았네.
     그리하여 어느 날 갑자기 나는 고등학생에서 등교 거부생으로 클래스 전직, 조금씩 고교 생활로부터 페이드아웃되어 갔다. 그래도 1학년, 2학년 때는 분발했다. 진급할 수 있을 만큼은. 하지만 그동안에도 새로운 카드에 스탬프가 모이게 마련이다. 고3 때도 1학기 동안에는 보건실 등교를 하며 분발했지만 여름 방학 전에 또다시 스탬프가 꽉 찼고, 그로써 나는 등교 거부생에서 이번에는 자택 경비원 클래스로 전직했다. 원래 학교 말고는 밖에 나가지 않는 인간이었으니 고3 여름 방학부터는 말 그대로 은둔형 외톨이화된 셈이었다.
     부모님에게는 이런저런 잔소리를 들었다. 당연히. 내버려 두길 바랐다. 어른이란 왜 아이의 마음을 모를까. 본인도 고등학생 시절을 경험했으면 분명 알 텐데. 이 나이대 아이는 부모가 잔소리를 하면 점점 고집스러워진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면 어른으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곤란하게도 이 세상은 결함투성이 어른으로 가득하다.

  •  이래 봬도 젊디젊은 처자이므로 심야 외출에는 그런대로 경계심이 필요하다. 잃을 것은 적지만 생명은 그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다. 뭐, 최근에는 왜 사는지 모르겠으니 그것도 의심스럽지만, 여하튼 도덕 수업에서 배웠듯이 생명은 소중히 여긴다. 일달은.

  •  겉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채 털레털레 걷는다. 수상해 보이지 않게 걸으려고 하면 수상해 보인다. 그러므로 평범하게 걷는다. 밤에 살고 있는 느낌. 짠한 건 알지만 은둔형 외톨이가 짠한 것은 기본이니 이젠 새삼스럽다.
     열등감은... 있다. 물론.
     어쨌든 인생에서 가장 빛날 수 있는 때일 테니. 청춘이란 말은 싫지만 헛되이 쓰고 있다는 것도 실감한다. 꼭 청춘이 아니더라도 뭐든 헛되이 쓰고 있지만. 시간도, 돈도, 사랑도, 은둔형 외톨이란 누구도 행복해지지 않음을 나는 안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는 자신이 불행해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안다. 상처받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세상에는 그것만이 중요한 인종도 있음을 도덕이나 윤리 시간에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꽤 진심으로.
     상처 받는 게 무서운 것이다.
     마음의 상처란 놈은 피가 나오지 않는 대신 딱지도 앉지 않으니까.
     이를테면... 종이에 손을 베인다. 아프고 피도 나온다. 하지만 그 피는 어느새 굳고, 머지않아 딱지가 되며, 이윽고 똑 떨어짐으로써 치유된다.... 그러나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학교라는 장소에는 그런 걸 모르는 녀석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나 같은 인간은 스탬프 카드를 탕탕 찍어 모아서 페이드아웃되고 만다. 별로 드문 일이 아니다. 분명 어느 학교에든 있다. 원인은 간단한 것이다.아픔에 둔감한 인간은 타인의 아픔에도 둔감하다는, 단지 그것뿐. 덧붙여 말하자면 아픔에 민감한 인간은 아픔을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런 인간을 섬세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다정한 세상이 아니라 무책임한 세상이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  장을 보면 왜 이리 신경이 소모될까. 쇼핑이 좋다는 여자애의 마음을 모르겠다. 남과 얘기하면 수명이 득득 깍이는 느낌이다. 아마존에서 주먹밥은 취급 안 하나, 방부제를 얼마든지 써도 상광없으니 오래가는 놈을 대량 판매하면 좋으련만. 살게, 1년 치 정도.

  •  어쩐지 이것저것 많이 얘기한 느낌이다. 이토록 떠든 건 오랜만이었다. 게다가 초면인 상대에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굶주려 있었는지도 모른다. 유대... 사람의 살갗이라고나 할까. 생생한 커뮤니케이션에.
     "사람과의 대화란 즐겁지?"
     야가미가 또다시 마음을 읽은 것처럼 말해서 왠지 분했다.
     "그 기분 알아. 나도 3년간 틀어박힌 후 워크숍에서 극약 처방을 받은 축이거든. 여기는 아니지만... 그때 오랜만에 생생한 인간과 대화하고서 아, 역시 뭐든 생생한 것이란 좋구나 생각했어."
  •  "자신이 추악함을 나 몰라라 하는 인간이 제일 추악하다고 생각해."
     야가미는 조용히 말했다.
     "나 몰라라 하면 안 돼, 고치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돼. 자신을 추하다거나 쓰레기라고 단정 지으면 절대 변할 수 없어.... 뭐, 나도 완벽히 성공한 건 아니고 지금도 자신을 글렀다든지 쓰레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빈도는 줄였다며 야가미는 웃었다.

  •  밖에 나가면 오감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 방에 있을 때도 사용은 하지만 발휘는 안 한다. 가상 세계는 시각과 청각밖에 요구하지 않는다. 현실 세계는 가을이었다. 아니, 이제 겨울이 되려는 참이다. 단풍이 든 나뭇잎, 차가운 초겨울 바람, 발밑에서 파삭파삭 소리를 내는 낙엽, 모닥불 냄새, 달콤한 군고구마.... 살아 있다는 것은 오감을 잘 사용하지 않으면 모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  방 안의 시간이란 정체되어 있다. 공기가 괴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 밖은 바람이 불고 공기가 순환한다. 시간도 순한하다. 그러므로 시간 가는 게 빠르다.
     컴퓨터가 내는 소리는 감미롭다. 여전히. 그렇지만 그 이외의 소리도 가끔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가능해졌을 때, 아마도 나는 이제 자신이 빠진 '구렁'을 올려다볼 수 있었으리라.

 

6장. 초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소녀에게 작별 인사도 못하고 사소한 갈등 때문에 이별한 일이 트라우마가 되어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지만 가까스로 회복하여 대학교에 진학하고도 여전히, 헤어졌을 때부터 현재까지도 계속 그 소녀를 생각하는 아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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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익숙지 않은 부엌일이며 집안일에는 어려움도 있지만 역시 처음인 것 일색인 매일은 두근거림이 끊이지 않았다. 학교 수업도 집에서의 생활도, 존재하지 않았던 고교 시절이라는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듯 나날이 자극적이라서, 내 눈은 의심의 여지없이 순진무구한 소년처럼 반짝였다.
     특히 대학 생활은 자신이 원해서 전문 분야를 배울 수 있는 만큼 역시 충족감이 있었다. 회화는 어릴 적부터 접해 왔지만 데생이나 색채, 디자인 등에 대해 다시 한번 전문 기술을 기초부터 배울 수 있어서 순수하게 감사했고, 그리고 그것이 피와 살이 되는 느낌에도 마음이 설렜다.
     학생으로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오랜만인 데에서 오는 신선함도 있어 시간은 날개 달린 듯 지나갔다.

  •  그녀와의 작별을 실패한 경험이 내게 트라우마 하나를 심어준 모양이었다. 누군가와 친해진들 또 그런 식으로 작별하게 된다면.... 아무리 과정이 즐거워도 마지막에 그런 고통이 따른다면 처음부터 친해지지 않는 게 나았다.
     안녕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괴롭고 어려웠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의 트라우마는 내 인간관계에 대한 사고에 커다란 그림자를 드리웠다.
  •  그 무렵 나는 접점을 잃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했었다. 접점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자신을 단단히 다그쳤다. 그것이 어떤 형태든, 왕따라는 부정적인 접점이라면 더더군다나. 그 후 자신이 은둔형 외톨이가 된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이라고 할 수 있었다. 접점을 만들지 않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스스로를 바깥세상에서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유급할 생각이었다. 혹은 부모님의 전근에 맞춰 전학 가든지. 그런데 은둔 생활이란 구렁을 깊이깊이 파고드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  구렁 밑바닥에 무언가 있으리라고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새카맸다. 온갖 접점을 배제하고 계속 파고든 끝에 오직 나만이 홀로 지면인지 뭔지도 알 수 없는 무언가의 위에 서 있었다. 송장처럼 바싹 마른 다리로.
     언제부터 안 거드렸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 책상 위에 손도 안댄 새 스케치북과 코발트블루 크레용만이 놓여 있었다. 자신이 내려온 구렁을 올려다보니 거기에도 코발트블루 하늘이 보였다.

  •  한 번 '밑바닥'을 안 인간에게는 평생을 따라다니는 저주 같은 게 있다. 자격지심, 열등감, 자신감 상실.... 뭐, 대략 멀쩡하지 않다는 꼬리표다.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붙이는 저주의 꼬리표.
  •  한여름에 전력 질주한 후 수도꼭지를 거꾸로 돌려서 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의 그 느낌. 미각이라는 쾌락과는 거리가 먼, 더 근원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그 감각.
     나는 굶주려 있었던 것이다. '접점'에.
  •  편지를 읽고 나니 슬며시 가슴속에서 우러나는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물감을 듬뿍 빨아들인 걸레를 짰을 때처럼 무슨 색인지도 모를 더러운 혼색이라 곧장 물로 씻어 내고 싶어졌다.
     내 추함은 내가 제일 잘 안다.
     내 동영상까지 찍어 관찰했다. 누구보다도 잘 안다.

  •  ─좋아한다는 건 그야, 매일 얼굴을 보고 싶다거나 목소리를 듣고 싶다거나... 자기 이외의 이성과 얘기하는 모습을 보면 불안하다거나, 그런 거잖아.

  •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즐겁다. 두근거린다. 일거수일투족이 신경 쓰이고 뭐든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멋없는 부분은 보이고 싶지 않고 자신의 귀여운 부분을 봐 줬으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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